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영수회담이 29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렸다.
윤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이 지나 처음 열리는 이번 영수회담에선 따로 정해진 의제가 없었던만큼 다양한 현안이 논의됐다. 영수회담의 의미와 더불어 역대 정권의 협치 성패 여부를 알아봤다.
영수 회담, 어떻게 성사됐나
영수 회담에서 '영수'라는 단어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한자의 본래 뜻은 옷깃과 소매로, 옷차림에서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이기에 지도자들을 이에 비유한다. 국가나 정치 단체 조직의 최고장이 서로 만나서 의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제1야당 대표 간의 회담을 의미한다.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던 시기부터 영수회담은 대통령이 야당의 협조를 얻어 국정을 풀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다.
물론 야당 측에서도 정부의 협조를 구하고자 할 때 영수회담 카드를 꺼내기도 한다.
이 대표는 당대표 취임 때부터 윤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해 왔지만, 윤 대통령은 여야 대표가 먼저 만나는 것이 순서라며 응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이번 4·10 총선에서 민주당에 절대 과반 의석을 내준 뒤 영수회담을 먼저 제안해 성사됐다.
이번 회담에서는 대통령실에서는 정진석 비서실장·홍철호 정무수석·이도운 홍보수석이, 민주당에서는 진성준 정책위의장·박성준 수석대변인·천준호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회담 테이블에 오른 의제는?
사진 설명,1987년 6월 24일 열렸던 전두환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영수회담
이번 영수회담은 별도의 의제를 정하지 않고 진행됐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여러가지 하시고 싶은 말씀 하셔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20분정도 걸리는데 실제 여기 오는데 700일이 걸렸다”며 민생회복지원금 수용,의료·연금개혁 협력, 거부권 행사 자제 및 특검 수용, 가족 등 주변인사 의혹 정리 등을 모두발언에서 언급했다.
그는 또한 “정치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국민을 존중하고 국민 뜻을 잘 따르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된다”며 “저희는 이번 총선에 나타난 국민 뜻이 잘못된 국정을 바로 잡으라는 준엄한 명령”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발언이 끝난 뒤 "좋은 말씀 감사하다"며 "평소에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오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모두발언 이후 대화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날 회담은 오후 2시에 시작돼 1시간20분 가량 경과한 오후 3시20분 정도에 종료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이날 회담에서 의대 증원문제 등을 논의했지만, 여러 현안에서 양측이 이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회담 사례 돌아보니
앞서 역대 정권 영수 회담은 25차례 열린 바 있다.
영수 회담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의 만남이 시초다.
회담에서 양측은 임시국회를 소집해 한·일 협정 비준안과 베트남전쟁 파병 동의안을 다루기로 합의했다.
박 대통령은 1975년 5월 21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영수회담을 하는 등 재임 기간 총 5회에 이르는 영수 회담을 열었다.
1987년 6월 24일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영수회담도 정국의 주요 분기점이 됐다.
민주화 요구가 절정이던 1987년 6월 24일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과 영수회담에서 4·13 호헌 선언 철폐를 요구했다. 전 대통령은 “모든 정국 책임을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넘겼다”고 비껴갔고 YS는 결렬을 선언했다.
하지만 닷새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여당의 6.29 선언이 나왔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시작의 물꼬가 된 것이다.
사진 설명,2000년 4월 24일에 열린 김대중 대통령(좌)과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우)의 영수회담 현장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00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이 총재 측에서 #일곱 번 만나 일곱 번 배신당했다는 '칠회칠배'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뒤끝이 좋진 않았지만, 의약분업 갈등 해결이나, 남북정상회담 지지를 끌어내는 등 초당적인 협력이 이뤄지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2005년, 본인의 탄핵 심판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소선거구제였던 선거제 개편을 촉구하면서 내각 임명권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당시 야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봤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이를 거절하면서 회담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이명박 정부 때는 3번 영수회담이 열렸다.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 두 차례 회담에서는 한미 FTA 등 현안이 논의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반면,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의 2008년 영수 회담에서는 경제 살리기 등 7개 합의사항이 발표됐다.
박근혜 정부 때는 여야 대표와 같이 만나는 3자 회동은 있었지만, 영수회담은 따로 없었다.
가장 최근 영수회담은 지난 정권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만남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 대통령이 야당 대표에게 협조와 조언을 구하려는 취지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홍 대표는 '북핵 폐기를 위한 회담이 되어야 한다' '한미 동맹 강화 조치가 필요하다' 등의 의견을 전달했고 서로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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