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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33

미국의 세계 문화 유산 미국은 전 세계 1121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24개가 자리한 곳입니다.자연적 또는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그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된 이 장소들은 동아프리카의 세렝게티(Serengeti),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s), 호주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처럼 독특하고 다채로운 곳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은 미국에 얽힌 모든 이야기와 미국 국민의 놀라운 다양성, 그리고 이 땅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샐리 주얼(Sally Jewell) 전 내무장관은 2014년 샌안토니오 미션스 국립역사공원(San Antonio Missions National Historic Park)을 세계문화.. 2024. 8. 16.
"카리브 해의 진주, 큐바(キューバ)를 알아보자!(8) 종합적으로 보면 통계상에 나오는 수치에 비해서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며 현실은 매우 열악한 편이라고 보는게 맞다. 애초에 대한민국 사람들의 경우, 개인 위생 관념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왔고 제때 제때 위험지역에 가면 예방접종을 맞아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만 알아도 당신은 이미 전세계인중에서 보건지식에 관하여 상위 10%에 해당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쿠바인들은 정부는 국민들의 의료혜택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외국의 돈 많은 손님들을 치료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거 같다고 냉소하기도 한다. 사실 쿠바 정부의 예산이 빠듯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말하자면 모두가 평등하게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이 쿠바의 현실이다. "평등"이란 단어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향으로 꼽을지도 모.. 2024. 7. 23.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7) 각 나라의 영화 개봉 포스터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7)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게바라는 1950년대 공부를 마치기 전에 오토바이 여행을 하였다. 이 여행은 억압받고 가난한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인디오들과 볼리비아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당시 체 게바라의 기록은 1996년 《라틴아메리카 여행 기록(Notas de viaje por América Latina》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Diario de motocicleta)》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2004년에 개봉하였다.   영화 시놉시스 23살의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생화학자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남미대륙 횡단을 계획한다.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사막을 건넌 후 아마존을 거쳐 베네수엘라까지 가는.. 2024. 7. 19.
"카리브 해의 진주, 큐바(キューバ)를 알아보자!(7) 1959년 혁명 전 쿠바의 의료 및 체계는 열악했다. 1959년 공산주의 혁명 후 집권한 쿠바 공산당은 의사 출신인 체 게바라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개혁 정책을 펼쳐 복지정책을 만들긴 했지만 1990년대 쿠바의 경제가 한동안 어려움에 처하면서 의약품이 부족해지고 인재들도 외국에서 봉사활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을 선호하는 데다가 쿠바가 2010년대 중반 이래로 저성장에 시달리고 있다보니 예산을 획기적으로 올리기 어려워서 애로사항이 많다. 사실 아래의 나와있는 문제점의 근본적인 원인은 예산과 제재 문제로 제재가 걸려있다보니 최신 의료기구이나 상당수 의약품을 들여놓기 어려운 면이 있는 데다가 의료예산은 쿠바 경제규모에 비하면 많이 배정이 되어있지만 그 돈 가지고 병원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거나 해야 해서 돈이 .. 2024. 7. 16.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6)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6)    일화1956년 12월, 그랜마호가 쿠바에 상륙한 직후, 알그리아 데 비오에서 정부군으로부터 돌연 집중포화를 받은 탓에 게릴라부대의 동지들이 사탕수수밭으로 도망가려 할 때, 동지 하나가 게바라의 발 밑에 가득 차 있는 탄약상자를 두고 달아나버렸다. 또 하나 그의 눈 앞에는 의약품이 가득찬 배낭이 있었으나, 탄약상자와 의약품 양쪽을 짊어지는 것은 너무 무겁다고 생각되었다.그 역시 사탕수수밭으로 도망가려할 때, 「의사로서 천직과 혁명전사로서의 의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딜레마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결국 탄약상자만을 손에 들고 달려갔다.국립은행총재로 취임한 후, 그때까지 풀 네임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던 지폐에의 사인에 「체」라고만 기입했다. 화폐에 부정적인 생각에서 한.. 2024. 7. 12.
"카리브 해의 진주, 큐바(キューバ)를 알아보자!(6)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태어난 곳이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고 춤과 음악 등을 즐기며 살아간다고 한다.건기와 우기가 있는 열대 기후를 보인다.2016년 3월, 유명한 DIPLO가 속한 Major Lazer가 아바나 말레꼰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운집 인파는 40만이라고 한다. 쿠바 거리를 돌아다니면 실제로도 저스틴 비버, 미국 힙합 가수들의 노래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후 롤링스톤즈도 아바나를 찾아 무료 공연을 했는데 이번엔 60만이 모였다고 한다.쿠바 요리는 마늘을 꽤 많이 쓴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 때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서 가족끼리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다만 길거리 가판대나 대중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소스를 적게 쓰는 경우가 많아 다소 밋밋하거나 단출한 편으로 딱 싼맛에 먹을만.. 2024. 7. 9.
"카리브 해의 진주, 큐바(キューバ)를 알아보자!(5) 한편 쿠바는 인종차별을 뿌리뽑기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서 교육 개혁을 실시해 왔다. 초등 무상교육은 그 이전부터 시행되어왔지만 극심한 빈부격차때문에 빈곤층 아이들이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아 실질문맹률이 상당했고, 특히 농촌지역의 문맹률은 40%대에 달했으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부유층이나 일부 공부잘하는 학생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1950년대 쿠바의 문맹률은 20%대를 기록했기 때문에 교육수준이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축이라고 볼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교육 자체의 불평등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쿠바 혁명 직후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맹퇴치에 공을 많이 들였으며 이후로는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에도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고, 성인문맹을 퇴치하기 위해서도 적지.. 2024. 7. 2.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4)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4) 일본 방문 1959년 7월 15일, 31세의 게바라는 쿠바의 통상사절단을 인솔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에서의 지명도는 낮아 『아사히신문』이 「카스트로・콧수염」라고 야유와 같이 보도한 것뿐으로, 타사는 무시하였다. 7월 23일에는 오전 중에 아이치현의 토요타 자동차공장의 트럭과 지프형 4륜구동차의 제조라인을 견학, 오후에는 신미쯔비시 중공의 비행기 제작장을 방문하였다. 24일에는 쿠보타철공사카이공장에서 농업기계의 제작을 견학하고 실제로 농업기계를 시승해 본 뒤, 마루베니, 카네보를 돌아보고 저녁에 오사카 상공회의소 주최의 파티에 출석하였다. 이 밖에도 게바라는 통상을 위하여 도쿄도 내의 제국호텔에서 이케다 하야토 통상상과 15분간 면담을 하고, 소니의 트랜지스터 연구.. 2024. 6. 28.
"카리브 해의 진주, 큐바(キューバ)를 알아보자!(4) 쿠바 국가 상징의 재밌는 점은 공산주의 나라 가운데 공산주의를 생각나게 하는 말(사회주의, 인민 등)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지 않고, 혁명 이전의 국호와 국기, 국가를 공산정권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주의 혁명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호인 쿠바의 유래는 지금도 불명확하다. 콜럼버스 도래 이전의 원주민인 타이노인의 언어에서 오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추정일 뿐이다. 한편, 포르투갈 남부 베자현에는 지금도 '쿠바(Cuba)'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는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인이라고 주장하는 소수 논자들은 쿠바라는 이름이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페인어 발음 [ˈkuβa](쿠바)와 달리 영어권에서는 Cuba를.. 2024. 6. 25.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3) 혁명가 체 게바라(3) 과테말라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멕시코 망명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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