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전한 약속」신기황 저
바다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그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들으러 이 섬에 왔다.
그와 나는 한때 약속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북쪽 끝에 있는 섬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그 약속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곳에 가서 그 공기를 마시고, 지도를 펴지 않고 길을 걸었다.
나는 늘 그의 옆에서 그걸 지켜봤다. 우리는 대책 없이 길을 잃었고, 그러면서 웃었고, 결국엔 돌아오는 길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날, 그는 홀로 떠났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바다를 보지 못했다.
바다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 같았고, 나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그가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희미하게 번진 글씨.
“레분섬. 쿠슈호 캠핑장. 봄과 여름 사이, 꽃이 피는 때에.”
그제야 기억이 났다.
우리가 처음 만난 해, 비 내리던 오후에 나눈 이야기.
그는 지도를 펴놓고 레분섬을 가리켰다.
“언젠가 여기서 만나자. 개불알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계절에.”
그게 우리의 비밀스러운 약속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러 왔다.
레분섬은 북쪽 바다의 끝자락, 물빛이 짙고 바람이 서늘한 곳이었다.
공항을 나서자 짙은 해무가 도로 위를 감싸고, 저 멀리 바다는 은빛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오래 묵은 기억이 발 밑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쿠슈호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였다.
풀잎은 바람에 눕고, 호수 위에는 낮게 구름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거의 닿지 않은 듯, 잔디는 부드럽고 고요했다.
나는 그 위에 작은 텐트를 쳤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호수를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꽃길을 따라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개불알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꽃들이었지만, 이 거친 바람 속에서도 꼿꼿했다.
나는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문득, 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바람이 이렇게 세면, 꽃들이 힘들겠지?”
“아니. 꽃들은 바람을 미워하지 않아. 바람이 있어야 살아남거든.”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바람은 고통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있자, 옆자리에 누군가 살짝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치 방금까지 누군가 함께 앉아 있었던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섬에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되자,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찼다.
도시에서 본 적 없는 별빛이었다.
나는 텐트 앞에 앉아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들렸다.
“왔구나.”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눈을 감고, 그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기를 빌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응. 왔어.”
그 순간, 등 뒤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차갑지도, 무겁지도 않은 손길.
마치 꿈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 향기는, 그 사람이 늘 가지고 다니던 바람 냄새였다.
마지막 날 새벽, 나는 호숫가를 걸었다.
바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나는 그가 웃고 있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온 것을 알고, 이제 안심했을 것이다.
짐을 싸고 배에 오르기 전, 나는 다시 약속했다.
“다음엔 내가 먼저 올게. 바람이 불 때마다 네가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섬을 떠나는 배 위에서, 멀어지는 레분섬을 바라봤다.
바람은 여전히 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마워. 잊지 않을게.”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잊지 않을게.”
그 순간, 햇빛이 바다 위를 비추며 번졌다.
그 빛은 마치 우리 둘의 약속이, 이 바람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거라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섬에 다시 올 때,
바람은 또다시 내 이름을 불러줄 거라는 것을.
「바람의 섬에 남은 사람」
바다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그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들으러, 이 섬에 왔다.
그와 나는 오래전 약속을 했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북쪽 끝에 있는 섬에서 다시 만나자고.
개불알꽃이 피고, 바람이 바다를 넘어 꽃잎을 흔드는 계절에.
그는 그런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약속을 진심으로 믿어버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부재는 시간을 무겁게 만들었다.
몇 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약속을 품은 채 살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낡은 책갈피 속에서 그의 필체를 발견했다.
“레분섬. 쿠슈호. 꽃이 피는 때.”
마치 오래 숨겨두었던 비밀을 풀어놓는 듯, 그 몇 글자가 내 가슴을 쳤다.
그리고 나는 떠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혹은, 그가 없는 자리에서라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쿠슈호 캠핑장은 고요했다.
호수는 바람에 스쳐 물결을 만들었고, 그 위로 구름이 낮게 흘렀다.
풀잎 사이에서 이슬이 반짝였고, 나는 그 위에 텐트를 세웠다.
그곳은, 누군가 오래 기다리고 있던 자리 같았다.
저녁 무렵, 호숫가로 내려가 보았다.
물이 잔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내 시선 끝에 무언가 스쳤다.
물 위에 아주 옅은 빛의 형체가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그것은 순간 사라졌다.
“그…인가?”
나는 무심코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공중에 녹아버렸다.
다음 날 아침, 꽃길을 걸었다.
바람이 꽃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그 속에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왔구나.”
나는 멈춰 섰다.
목소리는 확실히 바람 속에서 들렸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내 손등엔 따뜻한 온기가 남았다.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손을 잡고 있었던 것처럼.
그 순간, 오래전 봄날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우리가 함께 걷던 숲길, 그리고 그가 내게 했던 말.
“바람은 사람을 잊지 않아. 바람은 기억을 데리고 다니거든.”
밤이 되자, 하늘은 별빛으로 가득 찼다.
나는 텐트 앞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호수 위에 떨어져 반짝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물결 사이로 또렷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호수 위에 서 있었다.
늘 입던 낡은 재킷 차림, 살짝 웃는 얼굴.
빛이었지만, 분명히 그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그는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도 왔잖아.”
그 목소리는 바람과 함께 내 귀를 감싸고, 심장을 울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물 위로 발을 디딜 수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나를 감싸는 온기, 그리고 익숙한 향기.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바람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 날 새벽, 호수는 유난히 고요했다.
바람이 불었고, 나는 또다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음엔 내가 먼저 올게.”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꽃이 피는 때에.”
배에 오르기 전, 한 번 더 호수를 바라봤다.
물결이 잔잔히 일렁이며 햇빛을 품었다.
그 속에서, 잠시지만 분명히 그의 그림자가 웃고 있었다.
섬을 떠나는 동안, 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그건 이별이 아니라, 다음 만남을 예고하는 인사 같았다.
나는 그 바람을 가만히 품었다.
그리고 알았다.
그는 여전히 이 섬에 있다.
바람이 부는 한,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과거와 현실, 미래의 이야기 > 판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의 섬과 사라진 저주-판타지소설 (0) | 2025.08.01 |
---|---|
항구 도시 섬나라...카..... (3) | 2024.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