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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북미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4)

by 신기황 2024.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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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4)

 

일본 방문

 


1959년 7월 15일, 31세의 게바라는 쿠바의 통상사절단을 인솔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에서의 지명도는 낮아 『아사히신문』이 「카스트로・콧수염」라고 야유와 같이 보도한 것뿐으로, 타사는 무시하였다. 7월 23일에는 오전 중에 아이치현의 토요타 자동차공장의 트럭과 지프형 4륜구동차의 제조라인을 견학, 오후에는 신미쯔비시 중공의 비행기 제작장을 방문하였다. 24일에는 쿠보타철공사카이공장에서 농업기계의 제작을 견학하고 실제로 농업기계를 시승해 본 뒤, 마루베니, 카네보를 돌아보고 저녁에 오사카 상공회의소 주최의 파티에 출석하였다. 이 밖에도 게바라는 통상을 위하여 도쿄도 내의 제국호텔에서 이케다 하야토 통상상과 15분간 면담을 하고, 소니의 트랜지스터 연구소와 영화촬영소, 비료공장 등을 돌아보았다.

7월 24일의 오사카에 숙박했을 때, 히로시마가 오사카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다음날 코베의 카와사키 조선소를 시찰한 후에 예정을 변경하여 오마르 페르난데스대위와마리오 아르스가라이 주일대사를 동반하여 전일본공수기로 이와쿠니공항으로 날아갔다. 히로시마현 직원안내를 받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의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원폭자료관과 원폭병원을 방문하는 외에, 히로시마 현청을 내방하여 당시의 히로시마 현지사였던 오하라 히로오와 회담하였다.。딸 알레이다 게바라도 2008년 5월에 원폭희생자 위령비에 방문하였다.

한편, 게바라의 히로시마행에 대하여는, 「시내의 호텔에서 섬유업자와 만날 예정이었으나,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야간열차로 히로시마에 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오마르 페르난데스의 주장 이외에는 없고, 당시의 통역이었던 히로시마현 외사과의 미구치 켄조가 비행기로의 공식내방을 말하고 있는 것 외에, 1972년 시점에서 히로시마현 총무과에는 당시의 기록도 남아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세 사람이 몰래 빠져나가 야간열차를 탄다는 것의 부자연스러움, 무단으로 빠져나왔을 경우의 일본측의 반응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점, 카스트로가 일시적으로 수상을 해임하는 쿠바 본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절단 대표인 게바라가 방문국인 일본정부와 상공단체에 대하여 그러한 배려없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점, 또한 야간열차로 빠져나왔음에도 히로시마에서 현청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여, 페르난데스의 기억이 틀리거나 혹은 각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 때, 『츄고쿠신문』의 기자였던 하야시 리쯔오가 단독취재하였다. 그 때 게바라는 「왜 일본인은 미국에 대하여 원폭투하의 책임을 묻지 않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게바라가 히로시마의 상황을 쿠바에 전한 이후, 쿠바에서는 현재에도 초등교육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원폭투하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각지를 시찰한 후, 27일에 일본을 떠나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수단, 유고슬라비아, 가나, 모로코를 방문하고 9월 8일에 하바나로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일본과 쿠바의 통상협정이 체결되고, 현재까지도 지속 중이다.



체 게바라, 1959년 1월 2일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1961년)




그는 쿠바 혁명 승리 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 혁명에서 얻은 혁명적인 성과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체 게바라는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처형[민주투사를 사형시키다니.......]하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쿠바의 토지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상도 함께 겸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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