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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테트리스 40주년: 소련 개발자 아이디어가 세계로 뻗어나간 과정

by 신기황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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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알렉세이 파지트노프는 테트리스 개발 당시 29세였다. 몇 년이 더 지난 뒤에야 테트리스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1989년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GETTY IMAGES

40년 전, 소련의 젊은 연구원이 완전히 새로운 컴퓨터 게임을 떠올렸다.

1984년 알렉세이 파지트노프는 모스크바 과학 아카데미의 컴퓨터 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이 지루하던 차에 수학적 능력을 활용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비디오 게임을 만든 것이다.

 

1984년 6월 6일, 소련제 컴퓨터 ‘일렉트로니카 60’에서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파지트노프는 2011년 BBC 팟캐스트(Witness History)에서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 나오자, 다들 호기심을 보이며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다들 이 게임을 해봤고, 다들 이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사진 설명, 테트리스는 세계적 현상이 됐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펜토미노 게임

이 순간이 테트리스의 시작이었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테트리스는 놀라운 매력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이 아이디어는 고전적인 ‘펜토미노 게임’에 기반했다. 펜토미노 게임은 다양한 모양의 기하학적 도형을 움직여 빈틈없이 맞춰나가는 퍼즐이다.테트리스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정사각형 4개로 구성된 기하학적 도형(테트라미노)이 위에서 떨어지는 데, 플레이어는 이 도형을 세로로 긴 상자에 배치하면서 가로로 빈틈없는 줄을 만들어야 한다.

 

사진 설명, 테트리스는 닌텐도를 비롯한 여러 플랫폼에서 게임으로 출시됐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소련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드물었지만, 테트리스의 확산을 막지는 못했다.소수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서로 다른 컴퓨터로 게임을 복사하며 플레이한 것이다.테트리스가 ‘철의 장막(2차 세계대전 이후 상징적 경계선)’을 넘나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마치 스파이 소설같다.

사진 설명, 테트리스 게임의 목적은 블록을 빈틈없이 배치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ARCADESPOT.COM / TETRIS

세계적 관심

영국의 한 소프트웨어 업체는 헝가리에서 우연히 이 게임을 접하고 러시아 정부와 판권을 협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과 미국 사람들도 가정에서 테트리스를 즐기게 됐다.하지만, 게임 업계는 빠르게 변화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게임보이’와 같은 휴대용 게임기가 등장했다.

사진 설명, 테트리스는 닌텐도가 발매한 휴대용 게임보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닌텐도 게임보이

1989년, 헹크 로저스는 일본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테트리스의 무궁무진한 시장 잠재력을 깨달았다.그리고, 테트리스의 무대를 부피가 큰 컴퓨터에서 휴대용 게임기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제작자로부터 판권을 얻어야 했다.

사진 설명, 헹크 로저스는 휴대용 게임기의 테트리스 판권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으로 모험을 떠났다(2023년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 페스티벌에서 열린 ‘테트리스’ 영화 시사회 참석 사진)

사진 출처,GETTY IMAGES

로저스는 테트리스의 아버지를 찾아 모스크바로 향했다. 당시 소련과 서방은 오랜 냉전 끝에 역사적 해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그는 새로운 비디오 카메라와 아드레날린으로 무장하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로저스는 2011년 BBC 팟캐스트(Witness History)에서 “직전에 새 카메라를 샀는데 정말 즐거웠다. 기록을 남기고 재미있게 즐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설명, 게임보이는 1990년대 초반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모은 휴대용 게임기였다

 

소련 수출입 기관을 향해

처음 마주한 모스크바의 2월은 로저스에게 우울한 인상을 남겼다.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호텔에서는 TV도 라디오도 먹통이었다. 그는 “아무도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로저스는 소련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수출입을 관장하는 엘렉트로노르그테크니카(또는, “엘로그”) 사무실을 찾고 있었다.이를 위해 운전기사 겸 통역사를 고용했는데, 그가 의도를 바로 이해한 것 같았다. 통역사는 그렇게 어느 날 오후 로저스를 “엘로그”로 데려갔지만, “초대받지 않았기 때문에” 로저스와 함께 들어가는 것은 거부했다.로저스는 용기를 내 혼자 들어갔다.로저스는 어떻게든 테트리스의 판권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할 수 있었고, 이 제안으로 건물 전체가 술렁거렸다.그는 “개미집에 뜨거운 부지깽이를 꽂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며 웃었다.이후 알렉세이 파지트노프와 다른 8명을 소개받았는데, 8명 중에는 “KGB 요원과 정체 모를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로저스를 심문했다. 로저스는 “그들은 내가 정말 컴퓨터 게임 사업을 하는지 파악하려 했다”고 회상한다.

사진 설명, 게이머는 항상 테트리스와 클래식 게임보이를 기억한다(2019 런던 필름 앤 코믹 콘)

사진 출처,GETTY IMAGES

'지적재산권?'

당시 소련 관료들은 서구의 지적재산권과 비디오 게임 사업에 대한 개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에는 대체로 이해받지 못하는 매우 낯선 개념들이었다.하지만 로저스는 초반에 서로의 불신을 확인한 상황에서도 러시아 관료들을 끈질기게 설득해냈다.파지트노프는 2011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전에도 몇몇 사업가를 만났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업가라기보다는 사기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한편, 헹크는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게임의 핵심, 게임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설명, 알렉세이 파지트노프가 모스크바에서 체결한 계약은 테트리스를 휴대용 게임기의 세계로 가져왔고 로열티도 선사했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계약 체결

로저스와 파지트노프는 일주일의 협상 끝에 계약을 체결했다. 해당 계약은 해외의 테트리스 판매 수익에서 파지트노프 개인의 몫을 보장하는 전례 없는 내용이었다.로저스는 “다들 놀랐다”고 말했다.“소련 사람들은 제때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계약서에서 처음 봤는데, 이런 부분이 그들을 사로잡았죠.”파지트노프는 “내가 알기로는 이후 모든 계약의 프로토타입에 우리 계약서가 사용됐다”며 웃었다.

사진 설명, 세계적 인지도: 퍼듀 대학 농구팀 멤버들이 테트리스 블록으로 분장한 학생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로저스는 테트리스의 놀라운 인기가 유니크한 플레이 방식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대부분의 컴퓨터 게임은 폭력과 파괴에 기반하지만, 테트리스는 플레이어가 건축과 창조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다.로저스는 이편이 훨씬 흥미로운 활동이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이 인간의 기본 성향에 더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뭔가를 만들고 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지죠.”

사진 설명, 테트리스 대회에는 많은 팬들이 모인다. 미국 덴버에서는 매달 대회가 열린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10억 명 이상의 플레이어

오늘날 테트리스는 역사에 남을 게임으로 자리잡았다.가장 보수적으로 잡더라도, 최소 10억 명이 일생에 한 번 이상은 테트리스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다.초반에는 파지트노프도 로열티를 받기 어려웠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가 로저스와 함께 회사를 설립하면서 로열티를 제대로 받기 시작했다.현재 파지트노프는 워싱턴 DC에 거주한다.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인물로 손꼽힌다.

사진 출처,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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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니콜라이 보로닌
  • 기자,BBC 러시아 & 위트니스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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