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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습제강' 영상. 두 소년에게 수갑이 채워지고 있다 (샌드연구소 제공)
수백명의 학생들로 가득 찬 평양시청년공원야외극장.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빛 죄수복을 입은 두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 무대 정중앙에 섰다. 평양 삼마고급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다.
이들은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끌려 나왔다. 양손에는 수갑이 채워졌고 곧장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 받았다.
북한에서도 미성년자가 범죄를 저지를 경우 대개 일반 교도소가 아닌 소년교양단련대로 보내진다. 보통 5년, 길어도 10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노동교화소 12년형, 성인과 같은 형량이다. 그만큼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소년들에 이어 담임교원, 지역 청년동맹 책임지도원의 신상까지 가감없이 공개됐다. 사회적 연대책임을 묻겠다는 의도다. 두 소년의 가족들은 평양에서 추방된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 전례없던 일들이다.
이 장면들은 BBC 코리아가 샌드연구소를 통해 입수한 북한의 '학습제강' 영상이다. '제강'은 철강 속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2022년 중반 평양시가 주민 학습용으로 배포한 것을 내부 관계자가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북한은 이러한 내부 자료의 외부 유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또한 화면 속 평양 주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상 속 언급된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은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11월부터 2022년 1월'로 짐작된다.
'썩어빠진 괴뢰문화'...내부의 적을 찾아라?
영상 속 북한 아나운서의 설명은 적나라했다.
"지금 썩어빠진 괴뢰문화는 학생소년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자라나는 새세대들을 반동사상문화의 희생물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전 평양시청년공원야외극장에서는 괴뢰녹화물을 시청·유포시키다가 단속된 동대문구역 삼마고급중학교 학생들이었던 리00과 문00에 대한 공개재판이 있었습니다. 공개재판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기간에 수십 종의 괴뢰영화와 괴뢰TV극, 20곡의 괴뢰화면곡을 시청유포한 리00과 문00에게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라 각각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언도하였습니다. 리00과 문00은 이제 겨우 16살밖에 안되는 미성년입니다. 인생의 초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래문화에 유혹돼서 분별없이 돌아치다가 끝내는 자기 앞길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화면은 이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여성,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성을 차례로 비추며 이름과 주소 등을 공개했다. 또 이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대놓고 비난했다.
"대성구역 룡북동 41인민반에 살고 있는 최00입니다. 장딴지가 휑하게 드러난 짧은 바지를 입고 끌신을 신은 채로 거리에 나선 차림새도 문제이지만 자기의 이색적인 옷차림을 두고 수치를 전혀 느끼지 않는 그의 정신상태는 더 한심합니다."
"(최00) 차 타고, 여기 택시 타고 나왔습니다. 걸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케 하고 나오면 안됩니까?"
"최00은 잘못을 깊이 반성하기는 고사하고 단속성원들에게 까박을 붙이다 못해 나중에는 서성구역 하심동 61분반 2층 1호에 살고 있는 리금주라고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북한 당국의 논리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썩어빠진 괴뢰문화 오염자들'이다.
탈북민 최초로 일본 동경대 박사 학위를 받은 최경희 샌드연구소 대표는 BBC에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고 스스로 핵 보유 지위국이라 주장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 등 외부의 적을 내부의 적, 즉 한국 문화를 유포하는 반동분자에게로 돌릴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핵을 보유해 무서울 것이 없는 북한이 여전히 못살고 경제적으로 힘든 이유가 미국 때문이라고 주민들에게 세뇌할 명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남조선은 곧 반동"이라며 "이는 김정은 혈통만 믿고 바라보는 유일사상에 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한국 드라마와 노래 등 외부 세계의 정보를 유포하는 행위 자체가 북한의 유일사상체계를 와해시키는 반동사상이라는 설명이다.
최 대표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만들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 자체가 북한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동경이 곧 체제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전략자산 현장에만 모습을 드러내던 김주애가 새해 첫 날 닭공장을 방문하는 등 인민 생활에까지 관여하는 모양새를 보였다"며 "북한이 김정은 세습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주민들의 한국 사회 동경을 더욱 더 차단하고 중심을 강화할 것"라고 내다봤다.
북한 '학습제강' 영상 원본. 원본에는 이름 얼굴 등이 모두 공개됐지만, 기사에서는 비공개 처리했다 (샌드연구소 제공)
한국 드라마는 힘든 현실 잊는 '마약'
지난 2000년대 초, 한국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가 북한에 대거 유입됐다.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해온 한 평양 출신 탈북민은 "당시 많은 주민들이 드라마 덕분에 남조선이 잘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자신도 평양에서 드라마 '가을동화'를 즐겨 봤고 지인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한국 드라마 주제곡을 함께 흥얼거렸다고도 했다.
그는 "당시 북한은 한국 문화가 퍼지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이렇게까지 유행할 거라 예상도 못한 것 같다"면서 "지금 북한 내부적으로 가장 큰 적은 한국이고, 북한 당국은 잘 사는 남조선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 드라마를 보다 걸리면 뇌물로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한국 드라마를 보면 총살 당한다"며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 드라마는 힘든 현실을 잊게 하는 '마약'"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북한 주민 10명 중 9명 이상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한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지난해 11월 30일 북한인권단체 국민통일방송과 데일리NK가 북한 주민 50명을 전화로 인터뷰해 발표한 내용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외국 영상을 보느냐'는 질문에 50명 중 49명(98%)이 '한국 드라마·영화'라고 했다. 이어 중국 드라마·영화, 한국 공연, 한국 다큐멘터리, 미국 등 서방 드라마·영화(복수응답) 등이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한국이나 다른 해외 영상 콘텐츠를 본 뒤 달라진 점'으로는 10명 중 8명이 '한국 사회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답했으며 '한국식 말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 옷 스타일을 따라 했다'고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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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습제강' 영상 속 장면 (샌드연구소 제공)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제28조 '적대국 사상 문화 전파죄' 9
"적대국 영화나 녹화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 같은 것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보관한 자 또는 적대국 노래, 그림, 사진, 도안 같은 것을 유입, 유포한자는 5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5년 이상 10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국을 통해 더 많은 한류가 퍼지자, 북한 당국은 부랴부랴 지난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 2021년 8월 청년교양보장법, 2023년 1월 평양문화보호법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특히 반동사상문화배격법 공개 당시 북한은 그 도입 이유로 "반사회주의 사상문화의 유입 및 유포 행위를 철저히 막고 사상, 정신,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지난 2018년 한국에 정착한 20대 탈북민 김소영 씨(가명)는 "북한에서 남조선은 우리보다 훨씬 못 산다고 배우는데, 한국 드라마를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북한 당국이 그런 부분을 경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 역시 북한에서 '천국의 계단' 등 한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지만 처벌 때문에 대놓고 볼 수는 없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보면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 젊은 장마당 세대에게는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서울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다.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 보내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8월 북한 정권을 향해 주민들에 대한 사상 통제를 강화하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폐지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인권과 가치를 지키는 것은 수면 아래 백조의 다리와 같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포함한 유엔 관계자 3명은 지난 2021년 8월 북한에 관련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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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습제강' 영상 속 한 장면. 원본에는 이름과 얼굴이 모두 공개됐지만, 기사에서는 비공개 처리했다 (샌드연구소 제공)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 주민들의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며 사형 역시 의도적인 살인 등 가장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서한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들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라 처형한 인원을 공개할 것을 북한 당국에 요청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는 명백한 인권 탄압"이라며 북한과 김정은에게 국제사회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분석관은 "2014년 유엔 COI 보고서 발표 이후, 평양에서 인권 문제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폭 늘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만큼 북한이 인권 지적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겉으로는 개의치 않는다고 하지만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김정은 정권에게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 제기는 쉽게 무시하고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COI 보고서 채택 이후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 회부를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경희 대표 역시 "이 영상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강도 높은 인권 탄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면서 "소년들의 얼굴과 이름, 신상 등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 한상미
- BBC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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