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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연대기(5)

by 신기황 2024.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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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1961년)



체 게바라

그는 쿠바 혁명 승리 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 혁명에서 얻은 혁명적인 성과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체 게바라는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처형하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쿠바의 토지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상도 함께 겸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사망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이번 작전에서는 미국이 워낙 긴급으로 다루는 사건이었디. 빠른 척살. 그의 나이는 39세였다.(람보와 코만도가 영화로 흥행하면서  주로 나온 장소는 쿠바의 어느지역이었지만 쿠바를 완전 악으로 보이게 유도하고 람보와 코만도가 정의를 수호하는 자로 열악한 상황에서 특급으로 고도의 훈련된 병사가 혼자 적진에 들어가서 척살하는 내용) 총살 후 그의 시체는 볼리비아 정권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30년후 볼리비아 안데스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평가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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