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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실, 미래의 이야기/수필

홋카이도 레분섬(礼文島)의 아름다운 고산 식물 군락지[3]감성에세이편

by 신기황 2025.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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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분섬의 바람은 말을 걸지 않는다」

 

 

「바람이 말을 걸어오는 섬, 레분」

바다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그 말을 대신했다. 낯선 섬에 처음 발을 디딘 날, 나는 그 조용한 교신을 처음으로 알았다.

레분섬. 지도에서 보면 끝자락에도 붙어 있지 않은, 홋카이도의 북쪽 끝에도 이름 하나 붙여진 고요한 섬. 배를 타고 도착한 나는 이곳에서 아주 오랜만에 ‘고요함’이라는 감정을 새롭게 배웠다.

항구에 내리자마자 내 귓가를 스쳐간 건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풀섶을 가르며 오는 바람 소리였다. 익숙한 풍경도, 화려한 관광지도 없는 그곳은 처음부터 나를 "기억"이 아닌 "느낌"으로 데려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꿈속의 장소처럼.

섬은 한가로웠다. 걷다 보면 어느새 바다가 옆에 있고, 언덕 너머에서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 하나 닦아놓지 않은 오솔길 위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길 위에서 나는 한동안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왜인지 모르게, 울컥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조용히 채워지는 어떤 그리움이었다. 마치 내가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이른 아침, 나는 꽃의 길이라 불리는 하이킹 코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구름은 낮게 깔리고, 바다는 회청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길가에는 작고 야무진 야생화들이 풍경을 지키듯 자라고 있었다. 일본 이름도, 학명도 모르는 꽃들. 하지만 그 꽃들은 이름보다 먼저 나를 위로했다. 이름이 없어도 괜찮다고, 지금 이 순간 너는 충분히 살아 있다고.

레분섬은 말이 없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말로 이 섬의 가장 큰 말이었다. 사람이 없는 풍경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문득 내 안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내가 꺼내지 못한 문장들, 삼킨 말들, 오래된 편지처럼 미처 보내지 못한 마음들이.

섬의 북단에 이르렀을 때, 나는 바다를 등지고 풀밭에 앉았다. 저 멀리 사할린 섬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거리는 마치 과거와 현재 사이처럼 애매하고도 가까웠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었다. 원처럼 천천히 돌아,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시간.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목소리, 누군가에게 보냈던 마지막 안녕, 미처 다 하지 못했던 고백 같은 것들이 순하게 되살아났다.

점심은 작은 숙소 앞 벤치에서 먹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밥 위에 얹힌 매실 한 알. 짭조름한 그 맛에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이 바깥이 아닌 안으로 모여들었다. 식사 하나조차 이곳에서는 의식이 되었고, 그 조용한 리듬이 마음을 느리게 했고, 느리게 하여 따뜻하게 했다.

오후에는 그늘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바위틈에 핀 꽃, 땅 위를 바삐 가로지르는 벌레들, 그리고 나처럼 홀로 걷는 누군가와의 조용한 눈인사. 말보다 낯선 미소가 더 따뜻하게 남는다는 걸, 나는 이 섬에서 처음 배웠다.

돌아오는 길, 나는 사진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섬은 담기지 않는다. 대신 노트 한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이곳에선 내가 나에게 돌아왔다."

여행이란 장소가 아니라, 결국은 마음을 돌보는 방식이라는 걸. 그리고 어떤 섬은, 우리 마음을 아주 천천히 닦아주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걸.

그날 이후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는 그 섬을 기억한다.

레분섬. 말없이 말하던 바람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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