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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실, 미래의 이야기/수필

「바람이 대답한 섬 – 레분에서의 며칠」

by 신기황 2025.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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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대답한 섬 – 레분에서의 며칠」

바다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그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들으려, 이 섬으로 왔다.

레분섬은 홋카이도 북서쪽에 조용히 떠 있는 작고 외로운 섬이다. 아침에 부둣가에 내릴 때, 짙은 안개가 등뒤를 감싸 안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희미했고, 내 짐가방 바퀴가 자갈을 긁는 소리만이 현실감을 주었다. 목적지는 쿠슈호 캠핑장. 인터넷에서 본 몇 장의 사진, 그중 풀밭 위에 누운 텐트와 저 멀리 비치는 수평선의 이미지가 이끌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저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고, 이 섬이 나를 불렀다.

캠핑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길가엔 이름 모를 꽃들이 바람에 속삭이고 있었고, 숲과 바다 사이의 그 좁은 공간에 내 작은 텐트를 세웠다. 주변에 다른 여행객은 없었다. 텐트 지퍼를 열면 그 앞으로는 탁 트인 수면, 바람은 냄새를 실어 나르고, 파도는 말없이 해안가를 핥았다.

나는 며칠을 그곳에 머물렀다.

하루는 꽃들을 따라 걸었다.
레분섬은 ‘꽃의 섬’이라 불린다더니,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바닥 가까이 엎드려 피어 있는 개불알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보랏빛 엉겅퀴와 노란 금영화가 숲길 양옆을 장식했다.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꽃은 말하지 않지만, 침묵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에겐 충분한 교감이었다.

쿠슈호 근처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숲이 열리고,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햇빛은 구름 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려와 바다에 닿았고, 파란 물결은 금빛으로 일렁였다. 거기선 아무 소리도 필요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다. 흙이 바지에 배이고, 신발이 축축해질 만큼.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오래전 헤어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여행을 좋아했다.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다음’을 미루게 만든다. 바빠서, 돈이 없어서, 시간이 안 맞아서. 그러다 문득, 어떤 이별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걷지 못한 길을, 지금 대신 걷고 있었다.
이 섬의 모든 바람과 풀잎이 그 사람의 숨결 같았다.

밤이 되면, 별이 뜬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별.
불빛 없는 섬의 하늘은 잉크처럼 검고, 별들은 쏟아질 듯 촘촘했다.
그 아래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침낭에 몸을 묻었다.
바람이 텐트를 흔들었다.
그건 겁을 주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괜찮아, 네가 여기 있어 줘서 좋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나직이 대답했다. “나도 그래.”

마지막 날, 새벽에 일어나 바다를 보았다.
어스름한 수면 위로 아침이 번졌다.
기억 속 그 사람은 이런 풍경을 좋아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장면을 잘 기억해두려 했다.
그 사람을 위한 기억,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배에 오르기 전, 텐트를 천천히 접었다. 풀잎에 묻은 이슬이 손등에 닿았다.
어디에선가 갈매기 울음이 들렸다. 짐을 메고 마지막으로 한 번, 바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바다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고요함 속에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 섬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모든 침묵과 풍경으로 나를 껴안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이제야 돌아간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 조각은
여전히 그 바람 속에 남아, 풀잎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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